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슐리외 추기경 (문단 편집) === 프랑스의 실권자가 되다 === 본래 뤼송 교구[* [[한국 103위 순교성인]] 중 하나인 [[파리외방전교회]] 성(聖) 도리 김 헨리코 ^^(1839년 ~ 1866년)^^ [[신부(성직자)|신부]]가 이 [[교구]] 출신이다.]의 [[주교]]였으나, [[앙리 4세]]의 [[왕비]]이자 당시 섭정이었던 [[마리 드 메디시스]]의 눈에 들어 왕실 [[고문관]]으로 발탁되었다. 리슐리외가 발탁된 계기는, [[루이 13세]]와 [[안 도트리슈]]의 결혼 문제를 논하는 삼부회에서 리슐리외가 대단한 웅변을 펼친 것이 마리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.[* 이 때의 삼부회가 [[프랑스 혁명]] 직전에 열린 삼부회를 제외하면 마지막이었다.] 그러나 모친 마리와 사이가 매우 나빴던 [[루이 13세]]가 친정을 개시하면서 쫓겨나게 되었고, 모자(母子)의 권력다툼 속에 다시 마리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. 초기에는 마리도 리슐리외를 대단히 신임하였기에, 루이 13세도 모후와 화해하는 의미에서 리슐리외를 중용했고, [[교황청]]을 통해서 [[추기경]]으로 서임되도록 해 주었다. 그런데 1624년 [[루이 13세]]가 리슐리외의 복귀를 승인한 뒤에는 오히려 루이 13세의 최측근이 되어 마리와 대립하게 되었고, 리슐리외를 제거하려는 모후 일파의 음모가 리슐리외한테 사전에 발각되어 그들이 모두 처단되면서 루이 13세가 더욱 신뢰하여 마침내 재상에 임명되었다.[* [[프랑스/역사]]에서 유명한 '''기만당한 자들의 날 사건'''이다.] 이때 음모가 실패한 마리 드 메디시스는 국외로 탈출했고, 이후로도 자신의 차남이자 [[루이 13세]]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을 추대하며 내전을 일으켜 복귀를 노렸다. 그러나 이미 [[프랑스]] 국내에 더 이상의 세력기반이 없었고 어머니를 미워하는 아들 루이 13세가 귀국을 철저하게 막았기에 실패하고 만다. 결국 마리는 귀국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고, 평생동안 리슐리외를 증오하면서 보냈다. 딸인 헨리에타가 [[찰스 1세]]의 왕비였기에 [[영국]]으로 가서 잠깐 살기도 했고 [[독일]]이나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자신이 후원하던 [[루벤스]] 집에서 살기도 했지만 루벤스가 죽고 난 뒤 독일 [[쾰른]]에서 지내다가 루이 13세와 리슐리외가 죽기 몇 달전인 1642년 6월 3일, 69세로 사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